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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1970년 가을 - 인생은 짧으나 그 예술은 길다.

 

1970년 11월 늦가을의 기억들을 품고,.

2013년 1월. 창밖의 차가운 어둠을 한 뼘씩, 한 씩 지우며, 40여 년전의 애틋한 기억들이 은화 같이 반짝이는 눈발로 쌓이고 있다. 

1967년 3월 4일, 10시, *목멱골에서 불어오는 3월 초의 바람, 삼짇날을 이제 막 지난 후이어선지, 여전히 쌀쌀하다. 쌍백선을 두른 검은 모자 정중앙에, 금빛의 궁서체 中 자 글자의 교표를 달고, 목을 빳밧이 받친 하얀 플라스틱 칼라에 목을 불편해 하며, 우리는 서울 용산구 2가 1동 1번지의3만여 제곱킬로미터의 넓은 운동장주위에 서둘러 핀 영산홍 철쭉꽃 사이에   모여서서 입학식을 치뤘다.  단단한 체구에 검은 안경을 쓴 박원익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씀이 끝나고, 각 반 담임 선생님 인사소개가 이어졌다.

"송알 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 등의 동요를 비롯하여, 겨레의 당대희망가요라 할"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안석주 시인의 시를 작곡하신  안병원 음악선생님이 우리의 담임이셨다. 아마도 그해 가을 반대항 체육대회에서이었을 것이다. 몇 가지 경기에 이어, 각 반 선생님들을  위시한교장선생님까지 모두, 나서서 응원할 정도로 열띤 경기와,줄다리기 시합이 있었는데 ,,팽팽하게 밀고 당기던 줄다리기 경기에서 양쪽이 몇 번씩 넘어지고 일어나고할 정도로 일대 경기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내게서 서너명 앞에 떨어져 있던 최 정엽이 줄을 놓고    일어나 열을 이탈하 였다. 줄다리기가 끝나자마자 나는 정엽에게로 달려가 " 비겁한 자식!" 하는 외침과 함께" 주먹을 날렸다. 놀 란 얼굴의 그는코를 감싸 쥐고 주저  앉았다. 곧 이어  달려오신 담임 선생님의 만류로 더 이상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고등학생이 되어 그와 나는 다른 반이 되었고, 그가 몇 달 전에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는 소식을 내가입원한  병원에서 들었다. 사과하고, 화해하지도 못하고, 그와,작별한 것이다.1970년 봄, 타 중학교에서120여 명 2개 반의 새로운 친우들이 고교에 입학하여 합류하였다.. 문예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고 1떄였을 것이다. 당시는 해마다 가을에, 타교 여학생을 포함한 문예반 학생들을 초청하여 [청靑맥麥文學發表會}를 열였 다 . 자작시나 수필을 낭송, 낭독하는 모임이었 는 데, 어느 대학의 사상성을 가진 동아리' 청맥'과 명칭이 같다하여,--- -(이 시대엔, 남녀 학생 교류가무척 폐쇄적이어서 남; 여학생의 사적 교제는 언감생심이었기에, 이런행사가 공적 창구가 된 셈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과, 모교은사였던 장편소설 북간도의작가 안수길 선생님이 고정 초청 문인이 되셨고 이를 기화로 나는 未堂 스승의 私師사사를 받는 문하생이 되어, 사당동 예술인마을의 꿩우는소리가 들리는 스승님자택을 주 5일 드나들며  시 습작한 시를 보여 드리고  이따금 이론도 배우고,주로 청록파시인의 시 감상과 아울러, 시를 토론하며,공부하게 되었다. 청맥문학발표회는 10여 년의 전통을  드물게가진  문학행사였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선매우 드문1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그 명칭"청맥"을 바꾸라는 지시가 있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으나, 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행사 자체를 이어갈 수없게 되고 전통이 끊어지게 되기에 --- 곰곰히 생각하다가, 금잉어 노니는희용지 앞에서 문득 "용龍담潭"이란 단어가 떠 올랐다. 그래서 "용담문학발표회"라 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문예반장 직을 맡고 있던 나는 초청장 및 작품집 발간 등의 일로 충무로 인쇄 골목 등지를 부지런히 뛰어 다녔다.다과회 비용이 모자랐기에 시골동네에서 쌀 튀밥을 한 말 두 자루 정도 준비해서 직원 식당에서 열린,좌담회 뒷풀이 떄 내놨는데, 이게 호평을 받았다. 고1 때, 김동주, 등과 같이 5대 공립 남고교인 경기 서울 경복 문예반  남학생 들을 위시하여, 경기여, 이화여고, 숙명여고, 진명여 창덕여, 수도여,, 무학여고 문예반 학생들의 문학서클인 " 書友문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해 선배로 ' 김인모, 백운학, 신현천' 형들이 있었고, 두 해 선배로 ' 최 시한(後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문학상 受賞, 現 숙명여대 교수)' 선배가 있었다. 고2가 되면서 선배들의 추천과지지를 받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타교 선배로 는경기고의 화동 문학상을 받은'이 철' 선배가 있었으며,-후에, 유신 반대학생운동을 하다 경찰의 수배로 쫓기게 되었고, 나중에 국회의원과, 철도청장을 지내다, 퇴직하였다. )- 우리 학교출신 선배 문인으로는 임정남, 정희성,- 후에 민족문학 연합이사장이 됨-,윤후명 소설가(후에 이상문학상 수상)가 필명을 날리고 있었으며, 동아일보사에서,<모반> <유예>의  전 후 실존주의 작가.오상원 (1회) 소설가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희우 , 정 하연선배가 방송극작가로 크게 활동하고 있었다. 1970년에 校誌 ,<文 苑>이 20호를 맞게 되었다. 같은 문예반원이었던 김동주와 김필식, 최중현등이,20호 교지를 제대로 가치있게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1년 후배인 권오병, 권 영준에게 각계에서 이름있는 선배님들을 찾아가 인터뷰 하거나,  탐방 기사를 쓰거나, 원고를 받아오도록 하였다.  만화가 '신동우 화백과, 한국병원장한두진 박사, 영화배우 윤일봉 선배,  탤런트 '김세윤 (김창세) 선배, TBC아나운서 이 장우,형,- 공과 대학생으로서 행정고시, 사법고시 양과 모두 합격했던 전유방 형이 그 대상이었다. 전민규는 삽화를 맡기로 했다. 편집 마감을 얼마 남기지 않고, 민규가, 함께 밤을 새워 마무리작업하자고 제의해 왔다. 당시 파주는 접적지역이라  12시 자정이면통행금지가 되어 있어, 교통편이 모두 끊겨있던 터여서, 불광동에 있는  민규의 공붓방에서 편집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파주의 우리 동네로 같이 가기로 하였다. 민규 네서 다음날,  파주 금촌의 우리 집에 와서임진강의 샛강을 함께 거닐며, 노틀담의 곱추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떄, 민규에게 그림 작업에 대한 치하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하였다. 그러나 민규는 오히려  컷을 맡게해 준 것을 고마워 하며, 이 작업이 더 의미있는 학창시절이 되게할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 민규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그 이유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방에서,공부하다 잠이 들어,연탄 개스 중독으로 사망하였다는 것이다.그 며칠 후김 필식이의눈물 뿌리는 기도와 집전으로 도서관 앞에서 추도식을 가졌다.  그 해에, 고종후,신 권희, 장봉조 등이 주축이 되어,전국 각종농구대회를  석권  하는 등 22회이보선 23회김 승기선배, 25회신 선우 후배 들과 함께 대활약을 하였다. 이때  라이벌  경복고와 자주 쟁패를 벌였다. 박종원 홍승목 등이 필드하키에서 전국토에 바람을 일으키며 활약하였다. 5대공립고교 육상대회에선 당시 전교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배진수가, 평발의 고통을 이겨내고, 종횡무진 투혼을 발휘하여 종합 준우승의 쾌거를 이뤄냈다. 각종 체육시간에는, 박재철, 이기용, 김이환, 박수길,김회인,등의 친구들이 묘기를 보여주어, 함꼐 경기를 하거나, 보고 있는급우, 동기들의  탄성을 자아내거나 박수를받았다. 쉬는 시간 틈틈이 갖는 팔씨름에선, 이기룡이 뽀빠이  같은 팔뚝을 드러내며 무서운 괴력을 보이고,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였으며, 중국에서 전학온 위석창이 우리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지병으로 고생하던 수학 도사 노영석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할까? 권영봉은 내게 정비석의 장편 소설 중 야릇한 한 대목을 킥킥 거리며 자주 보여주어, 이후, 내게 소설 읽는 재미도 붙여 주었다.

, 또한 2학년 1학기에는 {묘한]이라는 묘한 제목의 등사본 학급지를 배진수가 필경작업하여, , 자신을 발행인으로 하여, 발간하기도 하였다. 하마 김상준 등 몇 친구는 수영실력으로 학창시절을 구가하기도 하였다.내게 문학의 집념을 갖게 한 고 (故) 전 민 규.! ㄱ는 갓으나, 그의  몇 점그림은 아프게 남아 있다.

 몇 장 그림과 노틀담의 곱추에 관한 독후감을  용산고등학교 교지 20호와 내 가슴 속에 남겨 두고 그는 아스라히 먼 곳으로 갔다.-민규는  에스메랄다를 그리워 하는주인공인, 못난이 곱추 콰지모토로 자신을 비유하곤 하였다. 이로 인해 나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글을 쓰기로마음 깊이 새겼다. 그 1970년 늦가을의 임진강샛강가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자세의 갈대, 띠와 부들이 냇물에 발을 담그고  수병처럼 줄지어 피어서 강기슭을 산책하는 (나와 민규)우리를 맞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도서관 앞 공터에서 오열하며 기도하는 김필식의  집전으로 민규에 대한 추도식을 가졌다.그 강가에서의 일이었다, 민규에게, 교지 삽화작업에 대한 고마움과 시간을 빼았은 데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하자, 그는 오히려, 학창시절을 가치있도록 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험성적 잘 받는 것보다,  우리들의 교지에 작품 하나 남기는 게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냐는 반문을 던졌다.그 가치를 누려보지 못하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저 세상으로 그는 갔다. 죽음과 이별, 미술작품이라는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명제를,  40년 내내 떠나지 않는 명제를, 오래된 사원에서 푸른 녹碌 조각들을 종소리와 함께 날리며 울리는, 종鐘 표면에 새겨진  다빈치의 조각작품인양, 나에게 깊숙히 새겨 놓고 1970년 11월의 늦가을 그는 떠나 갔다.

 다음 해, 늦 가을,종례 후, 담임 선생님께선, 나와, 필식과, 배진수를 부르셨다. 혹시, 선배들이 찾아와,선동하더라도 절대 동요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이후 많은 친구들이 유신 반대 운동 등으로 시달리는 등 고생을 많이 하였다. 우리 세대는 소위 베이비 부머 세대로서, 장남, 장녀가 대부분이었다. 시쳇말로 " 낀 세대" 가 되어 많은 면에서 힘들었다. 앞 자리는 선배들이 이미 다 차지하였고, ,선배들은 정의와젊은 피라는 구실로 우리를 최루탄연기와 냄새가, 눈코 못 뜨게 하는  교정으로 ,길거리로 이끄는가 하면 이어서 새마을 운동으로  내몰았고,  후배들은  컴퓨터와해외 어학경험 등으로  추격해 오고 우리는 애오라지,집안에서는 맏이로서,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여야 하는가 하면,  학교 매점에서 20원 짜리 우동과 10원 짜리 국물에다, 찬 도시락밥을을 말아 먹으며, 끼니를 때우고 자습실에서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등, 코피를 쏟아가며, 피눈물 나는 시절을 이겨내고, 운동을 할때는 운동으로, 공부 할 때는 학구열로 뜨거운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들의 몸을 얼싸  안을 때 아직도 뜨거운 친구들의 손과 팔이 정말 자랑스럽다.(이 떄는  송성문 선생의 정통종합영어와 홍성대선생 저 수학의 정석을 몇 번 마스터하는가가 실력향상의 관건이기도하였다) 예비고사를 치른 다음 날, 앨범 편집을 마치고, ,오동잎이 훌 훌 떨어져 내리는 希勇池용지 앞의 벤취에 앉아 나는 3,40년 후의 동기들을 상상해 보았다. "---먼 훗날 물 속에서 홀연히 일어나 뒤돌아보는 노인의 얼굴- - -" 등의 졸업앨범후기를 *희용지 앞 벤취에서쓴 다음, O. K 싸인을 써 넣고,나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그릇들이 되어 있을2,30년 후의 동기들을 상상해 보았다. 큰 정치가도 있을 것이며, 사업가,판검사와,목사님 등의 종교인, 대학교수의 모습도 그려 보았다. 2013년 현재, 벌써 20여 명의 동기들이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다시 반 세기 후, 어떤 모습들이 되어 또다시 만날까? - - - 못내그립다. 겨울 바람이 유난히  차다,* .라디오에선, 비틀즈의 예스터 데이, 탐죤스의 딜라일라,비키의 화이트 하우스,잉글버트 험퍼딩크의 채플 온 더 힐  등의 올드 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다. 그 때는 영화,"닥터 지바고"를 위시 하여,"로미오와 줄리엣"이 많은 관객들을 동원하였고, 주연 여우, 줄리엣 역의 올리비아 핫세가  많은학생들에게 회자되었다.

희 용지 : 용산고 본관 1 건물과, 본관 2 건물 사이에 있는 작은 연못. - 못 속엔비단잉어, 금잉어 등이 자라고 있었으며, 주위엔, 벤치, 커다란 오동 나무, 은행 나무, 여러종류의 관목,이 있어 많은 학생들의 만남과, 독서, 대화의 장소가 되었다.

*목멱산; 서울 남산의 별칭.

사당동 예술인 마을, 시인, 소설가,화가등의 등 예술가 등이 모여서 살던, 행정동으로는 관악구남성동.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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