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섭. 두발(頭髮)에 관한 몇 가지 단상(斷想)

두발(頭髮). 

많은 동기들이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이렇게 6년을 뼈에 사무치도록 마음에 품어 왔던 단어라 이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올라오리라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발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를 끄집어 내본다. 


1,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身體髮膚(신체발부)는 受之父母(수지부모)니 不敢毀傷(불감훼상)이 孝之始也(효지시야)니라.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이것은 부모님께 받은 것이니 감히 헐거나 상하게 아니함이 효도의 시작이니라).

<효경> 그리고 <소학>에 나오는, 효(孝)를 강조할 때 흔히 인용하는 문구다.


이 문구를 처음에 인용하는 까닭은 내가 태어나서 하얀 도포자락에 갓을 쓴 친구 할아버지께 가르침 받은 첫 번째 한문구이기 때문이다. 대여섯 살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여름 날 친구 집에 놀러가 재미있게 놀던 또래 서너 명은 친구 할아버지에 의해 대청마루에 무릎 꿇린 채 이 문구를 외워야 했고, 다음날 제대로 외웠는지 알아보겠다는 말씀에 다시는 친구 집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다만, ‘머리 깎으면 상놈 중에 대(大)상놈’이라던 친구 할아버지의 말씀만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지금도 유학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안동이란 곳으로 좀 외곽 지역에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논어>, <맹자>를 줄줄 외는 친구가 서너 명은 있는 그런 곳에서 공부하며 자랐다. 아주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도시, 밤꽃 향기가 꿈 많은 여고생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여 학업을 방해한다고 여학교 뒷산의 밤나무를 솎아내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향이다.(믿기지 않으신 분들은 밤꽃이 피는 초여름 산에 올라 그 향기를 맡아 보시라.) 그곳에서 어찌어찌 청운의 꿈을 품고 용산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나는 이 대목을 회상할 때마다 이희종 동기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시골에서 갓 올라와서 시험장에 들어온 어리버리한 시골촌놈이 자리에 앉고 보니 제일 앞자리(아마 수험번호 281번이었을 것이다.), 잔뜩 긴장하고 앉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서울 아이가 교과서를 펼쳐 보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흘깃 보니 온통 새까만 네모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 별난 놈이다’ 생각했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선 그렇게 공부했단다. 교과서의 중요 단어를 새까맣게 지우고 그것을 암기하는 식으로. 하기야 문제은행식 출제라 커트라인이 160점 만점에 150점대 중반이었던 것 같았으니까.)


여하튼 시험시간이 시작되고 나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음악이었다. 음악에 대한 소양도 없었지만, 6학년 담임이 음악에 문외한(농업고등학교 출신으로 교원양성소를 거친 교사였음. 당시에는 사범고등학교(지금 교대 전신) 출신이 절대 부족해서 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교원양성소라는 곳에서 1년 정도 수업을 받고 교사로 발령했었다.)이어서 6학년 1년 내내 음악시간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수업시간표에 편성된 음악 시간은 주로 체육이나 실업(토끼 먹이 구하러 산과 들에서 아카시아 꽃 따고 풀 뜯기가 주 업무)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그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던지 입학시험을 한 달 여 앞둔 10월에 다른 학년 선생님들을 초빙해서 3일에 걸쳐 음악교과서에 나온 노래들을 일사천리로 배웠던 기억이 난다. 특별한 과외를 받을 여건도 아니었으니 음악이 얼마나 나를 긴장시켰겠는가?


음악 시험지를 받아 들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서울 애가 갑자기 계명으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그때 감독선생님은 시험지를 뒤로 가면서 하나씩 배부하는 중이었고, ‘다들 눈 감아!’ 하는 명령에도 그 친구는 시험지를 흘깃 보며 계명으로 흥얼거렸다). 문제를 펼쳐 드니 그 흥얼거린 구절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음악 문제 유형, ‘비어 있는 부분의 계명에 맞는 것을 고르시오'하는 문제. 두려움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합격자 발표 명단에 내 번호가 있었고, 곧 이어서 내 옆의 번호 271번도 확인했다. 그 친구가 이희종 동기이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입학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아뿔사 머리를 빡빡 깎아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어릴 때 제일 처음 배웠던 문구, ‘身體髮膚(신체발부)는 受之父母(수지부모)니 不敢毀傷(불감훼상)이 孝之始也(효지시야)니라’가 생각나면서 ‘상놈은 되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며 다른 학교를 가겠다고 떼를 썼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후기중학교 입시까지 다 끝나고, 다른 학교 가려면 1년은 꿇어야 한다는 엄포에 눈물을 머금고 상경해서 빡빡머리의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2. 너 용산이지?


학교생활 동안 방학은 늘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혼자 서울에서 친척집에 얹혀 생활하는 상황이었기에 가족과 함께하는, 동생들이나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 들판과 낙동강을 누비며 지내는 시간은 꿈에도 나올 그런 기다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려가는 것. 지금이야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청량리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제대로 가면 12시간, 연착하면 16,7시간 걸리는 귀향길, 그래도 좋았지만 청량리역에서 열차 좌석을 차지하는 경쟁은 전쟁에 버금갈 정도로 어린 중학생에게는 정말 끔찍함, 그 자체였다. 지금처럼 좌석이 지정된 것이 아니라 먼저 앉는 놈이 임자인 시절이었다. 그래서 출발 시각 두어 시간 전부터 청량리역에 나가 줄 서서 기다렸다가 개찰구가 열리면 죽기 살기로 뛰어 열차에 올라타야 그 긴 시간을 그나마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긴 시간 내내 서서 승객들 틈에 끼어 제대로 운신하지도 못한 채 내려가는, 지옥을 경험해야 할 그런 상황이었다.


어느 날, 앞서 달리던 승객들 중 몇 명이 넘어져서 뒤엉키는 사이, 요행히도 내게 열차 칸에 오를 행운의 기회가 주어졌다. 열차 문손잡이를 잡고 뒤에서 당기는 손길들을 뿌리치는 아수라장 같은 전쟁을 하고 있는 사이, 옆에 지나가던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 용산이지?

그 말에 나는 잡고 있던 열차 문손잡이를 슬그머니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인지 아니면 애교심인지 모르겠으나, ‘용산은 이런 추태를 보이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날따라 연착에 연착을 거듭하여 18시간이나 걸렸던 그 긴 귀향길을 오롯이 서서 견뎌내야만 했다. ‘방학을 맞아 교복과 모자를 벗고 나의 신상을 드러낼 모든 장치들을 제거한 채 귀향길에 나섰는데 어찌 내가 용산인 걸 알았지?’ 역시 문제는 빡빡머리였다. 


3. 남성적이고 박력 있어 보여요.


등교 시간 정문엔 ‘자율봉사반’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조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한 때는 이 조직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이 곳을 통과할 때에는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경험을 하였다. 그러다 선배가 ‘너, 이리 와. 모자 벗어 봐.’ 이런 소리가 들리면 아득함을 느꼈다. 모자를 벗고 생활지도부 선생님 앞에 서면 머리를 재는 자가 등장하고, 이어서 바리깡(이 놈도 표준어는 ‘바리캉’이란다.)이 고속도로를 내는 장면을 목도해야 했다. 2부머리까지는 허용됐지만, 그러면 2주일에 한 번씩 이발관에 가서 머리를 깎아야 하는 번거로움과, 무엇보다도 넉넉지 않은 경제적 사정에 언제나 빡빡머리였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선배의 권유로 타 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하는 문학써클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많은 시간 활동한 건 아니지만, 남자들만 보다가 여학생들도 볼 수 있다는 호기심, 뭔가 있어 보일 것 같고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문학에 대한 환상 등이 어우러져 참여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는 빡빡머리. 나를 계속 주눅 들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K고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 머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모습은 마치 대학생 같은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럴수록 나는 주눅이 들어 항상 자리는 제일 끝 구석에, 그것도 언제나 모자를 눌러 쓴 채,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부러움 속에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여서 그룹을 지어 문학 토론을 하던 도중 잠깐 쉬는 시간에 옆에 앉아 있던 E여고 학생이 수줍게 말을 걸어왔다. ‘용산은 머리를 짧게 깎아서 그런지 너무 남성적이고 박력 있게 보여요.’ 남성적이지도 않고 박력과는 담을 쌓고 살던 나인지라 그 말이 공치사인 줄은 알았지만, 빡빡머리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교심과 자부심을 갖게 한 순간이었다. 


4. 우리도 한 번 해 보자


고등학교 시절 교련 과목이 있었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그 검열에 합격하기 위해 검열을 앞두고선 교련시간 이외에 별도의 시간을 내어 검열을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정말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 대학 진학을 준비해야 하는 인문고등학교에서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였다. 아마 1학년 시절이었을 것이다. 교련 검열을 위한 연습 겸 준비를 한참 하던 때었는데, 교련 선생님이 이런 말씀으로 우리들 가슴에 불을 지르셨다. ‘K고등학교는 다른 건 다 엉망이어서 그 결과가 불합격일 수밖에 없었는데, 머리를 기르던 학교가 교련 검열을 앞두고 단정하게 스포츠형으로 깎아서 그 자세와 태도가 훌륭하다고 검열관들이 합격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스포츠형? 우리는 이미 빡빡인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 우리 모두에게 드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 알량한 자존심과 끝도 모를 애교심이 발동해서 머리를 굴린 사진의 세 친구는 의기투합, ‘우리도 한 번 해 보자.’ 검열을 앞두고 이발관에 가서 머리를 더 밀었다. 소위 ‘백구치다’에 충실해서 머리를 아주 빡빡 밀고 검열에 임했다.(‘백구치다’의 원말은 ‘배코치다’로, ‘머리를 면도로 밀어 빡빡 깎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검열이 ‘통과’로 끝난 다음, 기념사진을 남겼다. 모자 밑 하얗게 번들거리는 옆머리를 보시라. 모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보이지 않는가? 그나저나 권영봉, 박영천.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들 지내고 계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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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심과 관련하여 사족을 붙이자면, 2학년 때인가 효창운동장에서 서울시 국공립남자고등학교(7개 학교였던가, 9개 학교였던가?) 체육대회가 열렸었다. 모든 학생들이 스탠드에 정렬해 앉아서 응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비를 피해 자리를 떠나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교가를 부르며 교복이 흠씬 젖을 정도로 그 비를 온몸에 흠뻑 맞으며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던 우리 동기들의 모습이 떠오르네. 

  

5. 빡빡머리 그 후


아이들이 좋아서 교직으로 진출했고, 40년 가까운 교직생활의 기간, 줄기차게 아이들의 두발과 씨름해야 했다. 때로는 ‘머리 길이가 그 무슨 대수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학창시절 빡빡머리의 추억은 두발 문제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단정한 머리, 단정한 외모에서 바른 마음, 바른 정신, 바른 자세가 나오고 그것이 나의 앞으로의 삶과 연결된다.’ 요즘 같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로 담임 맡은 학생들을 설득해가며 지내기도 했다. 그런 설득이 잘 먹히는 해의 학생들도 있었고, 그런 설득은 개소리쯤으로 치부하는 그룹의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인문고등학교에서의 최대 목표인 대학진학 실적이 분명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 설득에 넘어갔던 학생들이 많은 해의 아이들은 그만큼 순종적이라 학업이라든지 다른 부분에서도 순종적으로 열심히 했을 테니 그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던 해의 아이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적(?)이라 대학입시의 결과가 좋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대학 진학의 결과가 인생을 결정하지는 않더라는 것을 제자들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하는 바이지만, 어린 시절, 빡빡머리의 추억은 당시의 느낌과는 달리 언제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빡빡머리라서 좋은 운동화, 좋은 옷 신경을 써 봐야 별 의미 없는 일임을 일찍 깨달아 서로에게 관심을 쏟으며 우정을 다질 수 있었고, 맨머리가 드러나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지닌 그 순수함에 흠뻑 빠져 몸을 부딪쳐 가며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결과가, 오늘 ‘용산은 어디 가서도 역시 다른 것 같아.’ 하는 대학 동기들의 질시 어린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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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속의  오른쪽이  장광섭동기,,  다른  두명은  누구신지?

    권영봉, 박영천이네. 아마 1학년 8반이었을 걸.
    바쁜가운데에도  귀중한  원고를  보내준  동기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순차적으로  50주년게시판에  올릴  예정이니,  많은  회원들이  방문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신종계동기의  글은 e-book과  usb에 수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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