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훈 - 지구의 방랑자. 역마살 이야기

우리나라 사람치고 사주풀이 한번쯤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주에 역마가 들어 있는 사람은 항상 이곳저곳 잘 돌아다니거나 변동수가 많고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되는 인연이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별 생각 없이 살아왔지만 지난 내 인생을 돌이켜 보니 조금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충청도 시골구석에서 살던 내가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유학하여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마도로스를 꿈꾸며 한반도 동남쪽 끝 우리나라 제일의 항구도시 부산에 있는 해양대학에 진학하여 공부를 마치고 해군 함대본부가 있던 진해에서 군복무를 다함으로써 국방의 의무를 완수하였다. 그후 한반도가 좁게 느껴졌을까. 대형 상선의 항해사로 선장으로 20여년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이 좁다하며 오대양 육대주를 헤메고 다녔으니 역마살이 끼어서 그랬다고 해도 딱히 부인하지는 못할 것 같다.

 

승선 근무를 하는 동안 북극권인 북위 69도 알라스카의 레드독부터 남미의 최남단 마젤란 해협,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스에즈 운하, 파나마 운하 등을 수없이 통과하고 세계의 유명한 항구들은 물론 오지의 작은 항구들까지 수많은 항구들에 기항하며 화물을 운송함으로서 세계물류에 이바지 해왔다는 보람을 조금은 느꼈었다. 근세에 접어들어 여유로워진 경제 환경은 대량의 재화를 필요로 하는 곳에 저렴한 비용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선박이라는 매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흔히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하는 데 인생은 항해다라고 한 말은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바다로 나간다는 말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예측할 수 없는 여정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생과 같다.

 

항해라는 것은 출발지가 있고 도착지가 있다. 항구를 떠나 몇 시간만 바다로 나가도 하늘과 수평선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따라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육지에 가까이 있으면 레이다를 이용한 거리측정 등을 이용하여 위치 파악이 가능하나 멀어지면 그마저 소용이 없다. 제일 손쉬운 방법은 추측항법이다. 즉 위치를 알고 있는 출발점에서 현재 위치까지의 항행 거리 및 방향을 추정하여 현재의 위치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그 위치를 기준으로 주간에는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고 수평선이 보이는 새벽과 저녁 무렵에는 항해용 별의 고도를 측정하여 위치를 계산하여 결정한다. 위치가 결정되면 지나온 항적과 항행거리 등을 검토하고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계산하여 항로를 조정하고 목적지를 향한 항해를 계속한다.

요즈음에는 선박에 GPS, 전자지도 등이 장비되어있어 항상 위치 파악이 용이하며 인공위성을 이용한 통신도 가능하여 정보의 획득이나 교환도 원활해졌다. 예전에 행했던 불편했지만 낭만적인 별이나 태양을 이용한 천문항법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요즈음에도 밤이면 별이 잘 보이는 시골에 가면 밤하늘에서 항해용 별자리와 별들을 찾아보면서 옛날 기억을 되살려보곤 한다.

 

항해에 출발지가 있고 도착지가 있듯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면서 항해하듯이 우리의 인생도 삶과 죽음이 있고 각각의 단계에서 계획을 세우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 즉 자신의 분수를 알고 능력을 파악하고 주변의 상황을 잘 판단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을 성취할 수 있는 바른 길이다. 이러한 자세로 사는 것이 살면서 예상치 않게 부닥치는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인생은 항해라는 격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렇게 20여년을 파도 밭에서 뒹굴다가 99년 도선사 수습전형 시험에 합격하여 부산항에서 도선 수습을 시작하였다. 수습은 중세의 도제제도와 유사하게 선배 도선사 뒤를 따라 다니며 어깨 너머로 배우는 수습제도이다. 6개월에 걸쳐 500여척의 수습을 마치고 도선사 시험에 합격하여 20003월 개업하였다. 대한민국에는 약 250여명의 도선사가 전국의 항만에서 일하고 있는데 적은 인원이지만 도선법에 의해 면허와 도선구에서의 도선에 관한 사항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는 도선업무가 국가안보에 연관되어 있고 항만에서의 선박사고가 국가경제 및 물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은 반드시 도선사를 승선시켜야 하는 강제도선제도를 채택하여 운영하고 있다.

 

요즈음엔 도선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많이들 알고 있지만 과거 도선사라고 하면 불교 사찰과 관련지어 생각하거나 영어로 파일럿(Pilot)이라 하면 항공기 조종사를 먼저 떠올렸었다.

도선 업무를 쉽게 말하면 요즈음 호텔이나 음식점에 자동차를 타고가면 운전자가 주차장에 직접 주차하지 않고 지정된 주차 관리요원이 대신 차를 운전하여 주차해 주는 발렛 파킹서비스와 같이 선박들이 항구 밖에 도착하면 도선사가 승선하여 선장을 대신하여 안전하게 지정된 부두나 정박지에 계류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다만 크기가 커서 보통 선박의 경우 길이 200-300미터 정도이며 초대형선의 경우 길이 400미터 선폭 60미터 높이 60미터로 축구장 4개를 합한 정도이니 일반인으로서는 조금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높이가 381미터(안테나 제외)이고 여의도 63빌딩이 249미터이니 비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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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의 시작은 승선하는 일이다. 입항선의 경우 시속 15-20km로 이동하는 상태에서 작은 보트를 이용하여 선체에 접근하여 본선에서 준비한 줄사다리를 붙잡고 승선한다. 선교에 도착하면 선장으로부터 선박의 상태 주변의 교통상황 등에 대해 인계를 받고 선박 지휘권을 인수한다. 그리고 본선의 접안 계획, 항내의 기상. 부두 관련 정보 등을 설명하고 접안 작업을 지휘한다. 이후의 작업은 항해의 경우와 같이 항상 본선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를 기준으로 방향을 잡고 계류지까지의 거리와 본선의 크기 등을 고려하여 속력조절에 유의하며 진행된다. 선박에는 차량처럼 브레이크가 없다. 다만 프로펠러를 역전시켜 발생하는 후진 추력으로 선박을 세워야 한다. 물 위에 떠있는 육중한 무게와 큰 덩치를 다루는 일에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고마력 엔진을 장착한 예인선의 도움과 선박에 구비된 장치를 이용하여 밀고 당기고 전진하고 후진하는 단순한 작업들이지만 냉정심을 잃지 않고 선체의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접안 작업을 수행한다. 움직이는 물건을 다루는 것은 극한의 긴장감을 요구하지만 잘 마무리하고 나서 트랩을 내려오면 잊을 수 있는 장점도 있는 도선업은 오랜 승선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직접 두발로 뛰는 전문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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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에서 도선사 개업을 하면서 승선 생활을 끝냈을 때엔 이제 역마의 인연이 다했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서울로 진학하면서 나의 객지 생활은 계속 되었고 23년 무사고 기록으로 업무를 마치고 작년 124일 정년퇴직을 했다. 아내는 40년 만에 가장이 제자리에 돌아왔다고 무척이나 좋아했다. 나의 역마살 덕에 가족들의 고생이 많았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는 것 같다. 환갑이 되었을 무렵이었을까 좀 엉뚱한 생각 같았지만 나의 기억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어린 시절의 나와 육십이 된 내가 똑같다고 느껴지는 게 어째서일까 하는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그 이래로 그것은 내 마음속 풀어야할 숙제가 되어 남아 있었다. 책도 읽고 강의도 들었다. 그러던 중 내가 나라고 느끼는 생각, 감정, 오감 너머 또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존재감이었다. 마치 배경 영상처럼 눈길을 끌진 않지만 돌아보면 항상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느낌그것이 칠순을 바라보는 나를 나로 있게 해주는 자리였다. 돌아보면 편안한 느낌을 주고 눈을 감아도 어둡지 않게 빚나고 있는 자리. 이젠 그 자리를 따라 마음의 여행을 시작한다. 나에겐 아직 역마의 인연이 끝나지 않은 듯하다.

선장으로 마지막 선박을 도선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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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하고,,귀중한  삶의여정!!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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