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서 - 졸업 50년을 돌아보며

오늘 아침의 일이다.

아내가 내게 말했다.

여보, 염색할 때가 됐네요

, 벌써? 염색한 지 며칠 안 된 것 같은데그런데 따져보니 약 열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내가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벌써 50년이 흘렀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정말 월요일에 눈 한번 감았다가 뜨면 주일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기가 막히는 건, 내가 목사로서, 얼마 안 있으면 은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렸을 때 목사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목사님처럼 일을 하면서 목사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사는 게 싫었기 때문에~ 목사님들을 보면, 웬지 안돼 보였다.

목사님들은 사랑으로 을 행해야 한다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이익을 챙기지 않고 남에게 먼저 양보해야 한다. 또 남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면 복수를 하기는커녕 그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줘야 한다.

아니,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줘도 시원치 않을 원수인데, 그 원수를 생각만 해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목사님처럼 사는 건, 자기 감정을 숨기거나 자기 감정을 모르고 사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 목사님들의 행색을 보면, 채권자처럼 대개 까만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 같은 걸 가지고 후즐근한 모습으로 다니니, 가식적인 삶을 사는 것 아닌가?란 생각에 싫었다.

그런데 내가 목사가 됐고, 이제 2년만 지나면 은퇴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나?

 

나는 1954년에 부산 부전동에서 태어났다(호적- 1955). 그리고 1958년 사라호 태풍 때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오기 전에, 아버지께서 사라호 태풍이 쓸고 간 집터에 아버지가 손수 다시 집을 짓고 임시로 살았었다. 그런데 그후 1960년대에 아버지께서 그 집터를 가 보니, 사람들이 그 집에서 살고 있는 걸 보고, 그 집 사진을 찍어 오신 걸 본 기억이 있다.

그후 용산 중학교를 거쳐 용산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3학년 졸업 때 위암으로 별세하신다. 그런데 그 당시 영남교회에서 앞장서서 장례를 치러줘 감사한 마음으로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됐다.

그러나 사실 형식적인 교회 생활로, 몸만 교회를 다녔지 마음은 여전히 세상이었다.

그런데 교회에 나간지 얼마 안 되는 내게 교회 고등부에서 학생 회장직을 제안하는 게 아닌가? 당시 명문인 용산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명목으로 졸지에 원하지도 않는 학생 회장직을 수행하게 됐는데, 그러다가 학예회를 행함으로 고등학교 동창인 전현덕이 와서 하모니카 독주도 해 줬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예수님이 아닌 세상이라, 세상에의 미련을 떨치지 못하다가 대학교 때 토목을 전공하게 됐는데, 현대건설 토목부에 입사하게 됐다.

국내 현장에서 근무하다 당시 중동 붐이 한창이라 UAE(아랍토후국)의 현장에서 2년을 근무했는데, 19822월 초 귀국할 때 일주일 동안 유럽 3국인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순방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회사의 편의로 유럽을 돌고 들어왔지만, 다시 국내 현장으로 투입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자, 현장 생활에 싫증이 났다.

그러다보니 현장 생활을 하기보다 공무원이 좋지 않겠는가?란 생각이 들어 아내와 상의 후, 회사에 사표를 내고 기술고등고시(사무관급)를 준비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는데, 당시 6개월 정도 준비했는데, 1차에 합격을 한 것이다. 기술고등고시는 1차에 합격하면 2차는 2번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무슨 말인가?하면 1차 합격하면 물론 합격한 해에 2차를 응시할 수 있고, 만약에 그때 떨어지면 그다음 해엔 1차 시험을 안 쳐도 2차를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랬다. 1차에 합격했는데, 그 해 2차 시험에 떨어졌다. 따라서 다음 해에 자동적으로 2차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2차 시험을 재수했는데, 그때 교회를 다녔는데, 마음속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돈을 왜 버는 건가? 돈을 많이 벌면 뭐하고 또 못 벌면 뭔가? 나는 왜 태어났나?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나란 존재, 아니 인간이란 존재는 뭐고, 이 세상은 또 뭔가?’

 

사실 사춘기 때 이런 생각이 들었었지만 그 모든 걸 무시했었는데, 이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파헤치지 않으면 내 삶에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무엇보다 이것을 해결하는 게 시급했다. 그런데 그 당시 다니던 교회가 안양에 기도원을 갖고 있던 교회로서, 유명한 부흥강사들이 1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부흥 강사 목사님께서 증거한 말씀이 마음에 꽂혔다. 그 말씀은 자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자기가 걸린 질병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내게 독감이 있었는데, 내 마음속에 만약 그 말씀이 맞다면 한번 시험해 볼까?’ 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독감이 잘 안 걸리지만, 한번 걸리면 지독해 약을 먹고 최소한 3~4일은 고생해야 낫곤 했는데, 갑자기 한번 기도로 고쳐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병을 쫓아냈더니, 내 몸에서 열이 빠져 나가는 걸 느끼면서 독감이 가라앉는 걸 체험하게 됐다. 그러자 주위에서 나보고 신학대학원에 가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당시까지도 몸만 교회에 다녔지, 말씀도 모르고 기도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내가 그런 걸 몰라도 일단 신학을 하게 되면, 예수님이 살아계시니까 내게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해 주시지 않겠는가?’ 는 생각이 들었다.‘어차피 인생은 고생인데, 내가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발버둥치다가 죽으면 의미가 있지만, 삶의 의미도 모르면서 발버둥치다 죽으면 그것처럼 서러운 건 없을거다란 생각이 들어 그래 내게 생고생이라도 그 고생이 보람되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겠나?’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장인께서 목사님이신지라,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해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힘들었다. 왜냐하면 말씀도 모르고 기도할 줄도 모르고 등이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내 성품이 올바로 형성되지 않아, 모든 면에서 좌충우돌한 것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직장에 사표내고 6개월만에 기술고등고시에 1차 합격한 것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집중해 노력하면 할 수 있는 내 정신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신학은 영적인 문제이다보니, 내 자신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성품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품처럼 되지 못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진리가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다 보니 그것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며 목회를 하다보니,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왜 인간은 태어나야만 했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 등을 알게 되니, 너무나도 기쁜 마음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종교도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을 하지 못 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 외에는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3학년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손흥빈 선생님이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우리에게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야, 거기엔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맞는 말씀이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긴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날,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도 싫어했던 목사를, 내가 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컬하지만, 지금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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