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철 - 용산맨의 성장 기회 그리고 노화 – 삶과 책임

19671월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합격자 발표를 들으면서 내 번호가 나오자 가족이 와! 하는 소리가 퍼졌지요. 몇 분 뒤 옆방에 사는 친구는 불이 꺼지고 조용. 재방송도 듣고 나서 즐겁게 잠들었지요.

중학교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학교에 갔다 올 때 동네 어르신 들이 축하해 주던 모습. 중학생이 되고 난 후 고등학교 시험이 없어져서 동계 진학으로 용산고등학교 다녔지요. 원래 480명 정원이었는데 120명을 시험으로 추가 선발해 600명 정원 이었지요.


중학교 다닐 때 도서관은 중고등학교 공동으로 장서가 엄청 많아서 원하는 책은 거의 다 있었고 점심시간에 책을 읽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빠졌었고 나중에 한국문학전집을 구매하는 계기가 되었네요. 당시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을 집안에 두는 게 유행이어서 이를 판매하러 다니는 분 들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선배들이 하던 방식을 따라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학교 식당에서 저녁식사 후 밤 9시쯤 학교를 나와 집에 도착하면 10시를 조금 넘었지요. 아침 7시쯤 집을 나오고 한밤에 공부하는 일은 없었고 집에 가면 바로 잠들고 깨면 식사 후 바로 학교에 가는 일상이었지요. 방학 때나 시험 기간에도 집에서 공부한 적은 없었고 항상 학교에서 생활하였네요. 그러다 보니 고3 여름방학 때 밤에 수영장에서 수영하다가 교장 선생님이 나타나 나는 평소와 달리 재빠르게 철조망을 타고 넘어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 붙잡힌 몇 명이 정학을 받았지요. 같이 수영한 친구 이름을 대라고 했는데 내 이름을 안 불어서 나는 정학 리스트에 빠졌지요. 어쩌다 친구를 만나면 이야기합니다서울대학교 입학 후에도 용고 모임은 계속되었고 그중 수영장팀은 까시클럽이라고 자주 만났고 지금도 몇 달에 한번 정도 서울교대 건너편 식당 근처에서 만난다 합니다.


1978년 여름 대학 졸업 후 대우자동차, KCC연구소를 다니다가 1980년 홍릉 연구단지에 있는 산업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서울대학교 석·박사 학위과정을 하였지요. 젊을 때라서 몇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피곤하지 않았지요. 연구소 친구모임에서 볼링장에 다니다가 중앙문화센터에서의 소셜댄스강습에 등록해 다녔습니다. 강사는 프로 남성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강사와 함께 실습한다고 용산 대로변에 있던 나이트클럽에 갔습니다. 배운 것이랑 너무 다르고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대로 좀 더 배워두었으면 하네요.


박사 과정 중인 1986년에 결혼을 하여 1988년 일본 쓰꾸바의 무기재질연구소에 박사논문연구를 위해 연구조수를 하였고 19902월에 서울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네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나니 신분이 바뀐 것처럼 새로운 인생 기회가 오고 19913월에 군산대학교 교수로 취입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개포동 아파트에 살면서 군산에는 원룸 셋집을 얻어 학교에 출근하였고 주말마다 서울로 오는 주말 부부를 하였고 그 3년 뒤에 가족을 데리고 전주 롯데아파트에 살면서 호남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에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어바나 샴페인 (UIUC)에서 포스트닥을 하였고 당시 큰 애가 6살 작은 아이는 2살로 한참 아이 키우면서 미국연구생활에 바탕을 닦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약간의 연구지원금과 서울에서 가져간 비용으로 살았네요. UIUC는 명문대학으로 한국 유학생 대부분은 한국의 일류대학교수로 돌아간다는 자긍심에 차있었지요. 나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군산대학교수이고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도 아래로 보는 수준의 분위기이었지요. 한국인 학생이 제법 많았고 일리노이대에 있는 유학생과 현지 한인 동포와 용산모임을 만들어 월 한번 정도 회식을 하였습니다. 유학생 모임은 일주일에 한번으로 회장을 하였지요.


2000년 여름에 미네소타대학교 치과대학 3M연구센터에 방문연구자 자격으로 1년 계약으로 머물게 되었고 개인연구실을 배정받아 연구를 하였습니다. 아이 둘은 초등학교 2학년과 5학년으로 배정받아 학교를 다니는 데 막내 아이는 영어가 안 되어 처음 일주일 뒤 울면서 집에 왔는데 이유를 물으니 대화를 못해서 운다네요. 2주일 뒤부터는 매일 웃고 다니는 어린이로 처음 배운 영어가 미리 영어를 배워두었던 형에 비해 원어영어를 쓰게 된 원인이었고 영어를 모르는 체 미국생활에서 배우는 게 훨씬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네소타대학교에 머문 1년 사이에 전념을 다해 연구에 집중하였고 6개월 지났을 때 윌리엄 더글라스 교수가 내게 무슨 연구를 하고 싶은지 30분 이내에 제목 두 가지를 써내라고 하였지요. 20분 뒤에 A4지에 제목 둘을 적어내니 인산칼슘과 젤라틴 단백질을 이용한 인공뼈 치아를 연구과제로 정하였지요. 그리고 비서에게 연구비 10만 달러를 지시해 놓았으니 6개월 이내에 결과를 발표하라고 하였지요. 거의 휴일이 없이 연구실에 출근하여 4개월 만에 SCI급 저널에 두편을 투고하게 되었네요. 이때 더글러스 교수가 원고를 세세히 읽어주는 데 5번을 수정하였지요. 보통 미국에서 박사논문 지도하는 경우에도 두 번 이상 초안 수정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때 내 논문이 세계 최초의 연구로 향후 큰 연구방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하면서 내게 제안을 했습니다. 1년 계약으로 한국에 돌아가기 한 달 전 내게 한국 직장을 그만두고 미네소타대학교 교수 자리를 제안했지요. 하루 고민 한 후에 더글러스 교수를 찾아가 내 의중은 한국에 남기를 원하다고 했네요. 나는 한국 국가공무원 교수로서 65세까지 보장이 되어있고 퇴임 후 연금이 보장된다고 하니 연금 같은 금전은 문제가 전혀 없는 데 미국에 정년 보장제도가 없다고 했지요. 내가 여름 겨울 방학에 계속 올 수 있으니 일하는 만큼 보수를 지급받기로 하고 가족의 의료보험은 보장해주기로 했지요. 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고 내 소속 직장인 군산대학교 총장으로부터 J비자를 H비자로 전환하는 영문 서류에 사인을 받아서 해결했습니다. 연구교수로 왔다가 이후 직업을 갖는 H비자로 전환하였지요. 그에 따라 군산대학교에서는 내게 해외출장비를 지불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실비를 지급받았습니다.


처음 1년 간은 연구소에서 지불하였고 그 이후 내가 FDA 연구비를 받게 되어 모든 비용은 내 연구비에서 지불처리하고 연구 성과 및 실적에 의해 3년 뒤 영주권 신청 최상급인 Extraordinary 연구자급에 신청해 두 달 만에 영주권 허가를 받게 되었지요. 이로부터 모든 대접이 달라져서 미국에 입국할 때부터 자동입국이 되었는데 이후 자주 미국 한국을 왔다 갔다 하니 이를 문제시하자 나는 영주권을 포기하고 여행비자로 다니고 있네요.


한국에서는 미국에서의 바탕 연구로 교육부 기초연구과제를 십년간 연속해서 받게 되었고 마지막은 은퇴 1년 전에 3년 연구를 결정 받아서 은퇴 후 2년간 군산대 연구실에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연구는 교육부 과제로 10년간 계속하였고 중소기업과의 산학연구에 집중하였고 그로 인해 기업자문을 하던 기업 회장과는 지금도 자문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은퇴 삼년 후부터는 연구과제를 벗어나 자연과 삶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Introduction to Molecular Biology” 서적을 3번 독파하면서 생체현상에 대한 기반을 닦으며 자연 속 삶이 무엇인지?”를 글로 적고 있네요. 2년 전까지 군산에 살 때는 은파 호수와 근처의 논밭을 자전거로 돌아다니면서 계절 변화를 함께 보면서 느껴왔고 서울 강남으로 옮긴 후에는 양재천과 구룡산, 근처 아파트 단지 주위를 걸어 다니면서 인간과 애완동물 그리고 자연의 변화를 매일 보면서 느끼는 점을 글로 적어나가고 있습니다.


장명철01.png

용산중고등학교 (사각형 틀) 1930년 남산의 씩씩한 건아!


장명철02.png

용고 24회 서울공대 모임 왼쪽: 신종계, 이시복, 이병로 오른쪽: 최창헌, 고상근, 장명철
202357일 일요일 교대역 근처 음식점


장명철03.png

20205월 정읍미술관 가상체험

게시글이 어떠셨나요?



다른 이모티콘을 한번 더 클릭하시면 수정됩니다.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