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권희 - 농구부일지

용산중학교 농구 특기생으로 ‘67년도에 입학한 후 일년간은 매일 운동 끝나고 탈의실 집합이 마지막 일과였다. 당시 입학 동기는 고종후, 장봉조, 최승조, 박광호(25회 졸), 유영철(경복고), 안기영,그리고 나 이렇게 7명이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2학년 때엔 봉조는 무릎 수술하면서 하차하고, 승조, 광호, 기영도 빠지고 새롭게 강인원, 이동명, 허세봉, 이재형, 박수영, 박수인(26) 형제가 합류하여 용산중 농구부를 빛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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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에게는 그때가 전성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 방과후, 아니 4교시후 연습하러 여학교 체육관을 순회하며 돌아 다녔다. 신광여고는 작은 집이라 할 정도로 우리 체육관이었다. 숙명, 진명, 숭의 등 체육관있는 여학교는 거의 다 돈 것 같았다.

그때 제일 고생(?)한 세봉이는 포지션이 센타이기에 가운데에서 여고생 누나들에게 휩싸여 허우적대다가 입술박치기까지 하는, 그래서 잠시 상대방이 시합 중 멈추는 사건도 있었지. 예쁜 여학생한테는 돌멩이처럼 단단한 동명이가 대쉬하고, 영철이 역시 대단했었지.

아무튼 정말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동계진학하고나니 새롭게 오인영(작고), 김종성(작고)이 들어오고 종후와 인원이 나까지 5명이 되었다.

 

’72년 춘계 농구연맹전이 고3의 첫 시작을 여는 시합이었다. 당시 우리는 단신이지만 폭발적인 스피드로 우승 후보로 지목되던 팀이었다. 그러나 예선전이 열리던 무학여고 체육관은 농구코트가 규정보다 약간 넓은 관계로 올코트 프레싱을 하는 우리는 쉽게 지치는 바람에 예선 탈락 위기까지 몰렸다. 3인 우리들은 일찌감치 짐을 싸서 대입 준비나 해야겠다고까지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승리그에 오르고 장소가 장충체육관으로 바뀌자 물 만난 고기처럼 훨훨 날라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진출하였다. 거기까지였다. 신일고가 75:69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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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대회는 전통의 쌍용기 대회였다. 예선전에서 휘문에게 78:76으로 지고, 계성고와 77:74, 양정고 105:98로 각각 물리치고 결승리그에 올랐다. 결승리그 첫상대는 춘계때 우리의 결승상대였던 신일고였다. 절치부심 끝에 96:95로 이기고 기쁨을 만끽하고 이번에도 끝. 22패로 대회를 마감하고 개인상으로 최우수상 신선우(25)인 것으로 위안했다.

신문에 소개된 용고 농구부 창설은 ‘67년으로 21회가 창설멤버로 소개되고, 당시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싱가폴 원정 청소년 농구대회 파견 시합은 다른 학교가 모두 나이 제한에 걸려 불참하고 고2였던 21회 선배들이 예상을 깨고 휘문고를 이기는 파란에 우리를 더욱 환호하게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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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마지막은 한.중 고교 농구대회였다. 자유중국의
남산상공고교를 초청하여 국내 우수고교 휘문, 신일, 배재,
경복, 그리고 용산고교와의 경기다.
남산상공고교는 이 대회에서 큰 키와 스피드로 한국고교 팀
(휘문, 신일, 배재)들을 큰 점수차로 이겼으나,
우리는 더 빠른 스피드와 중거리 슛으로 83:81로 물리쳐
한국 고교 농구의 체면을 지켜냈다.

 

갑자기 24회 농구부를 소개하려고 지난 스크랩 북을 들춰 보니 나름 용고 농구부의 전통에 흠나지 않게 잘 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졸업때 까지 같이 농구부를 지켜왔던 주장 강인원, 고종후가 새삼 자랑스럽게 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먼저 떠난 오인영김종성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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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 한몫 단단히 했네, 자랑스럽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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