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택 - 나의 건반

나의건반

 

어느덧 올해도 세달밖에 남지않았다.

어제 저녁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려 밤을 설치다보니 평시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집주위를 산책 한후 거실창문에 비친 창밖의 풍경은 가을의 느낌을 더욱 주는듯 집앞 단풍나무가 아침 햇살에 투영되어 붉게 느껴진다. 올 여름은 어느해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이제 나이가 8순을 바라보니 하루밤 자고 살아있으면 감사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언뜻 생각난다. 늘 하던것처럼 습관적으로 나의 몸은 피아노로 가서 아침에 칠 악보를 뒤적인다. 시력감퇴로 몇 년 전부터 악보가 부분적으로 안보일 때가 종종 생길때는 나도 모르게 서글퍼지는건 안보여서가 아니라 칠 수 있는 곡들이 줄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따라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1”의 악보가 크게 보인다. 10여년 전쯤 우연한 기회에 피아노교습소에 찾아가 1년안에 연주하게 해 달라던 바로 그곡이다. 그곡 뒤 붙어있는 파일에 빛바랜 문장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하루의 일을 마친 차의 귀가 행렬이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저녁

조그만 음악실에 불이 켜진다.

곱은 손을 조물 거리며 악보를 편다.

 

무모한 도전을 한지 어언 일년

하나의 의지로 미약한 자신을 돌아보지않고 시작한 일

나의 작은 소망은 칠순 즈음하여 음반에 손을 제대로 올려놓는 일

이제 부분이나마 느리게 호흡에 맞지않게 길을 걷는다.

아직은 먼길이지만 아직도 미흡하지만 뿌연 안개속에

희미한 등불을 향해 걷는다.

 

어느덧 두손은 건반위에 자리를 하고

느리고 숨가쁘게 미로를 찾아나가는

어느날 저녁

입가엔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20228월초 늦은 저녁 혼자 연습하다보니 어느덧 시계는 9시를 향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 745분부터 30분 피아노레슨. 교습소를 옮긴후 8개월째 이어져오고 있다.

교습소를 옮긴 건 코로나로 인해 작년 3월부터 시작한 교습이 7월초 코로나 확산으로 폐쇄되어 5개월이 흘렀다. 생전 처음 피아노 앞에 섰을 때 두려움, 그러나 지금 안하면 영영 못할 것 같은 아쉬움으로 우연찮게 시작을 하게 되었다.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초등학생 위주의 주2회 교육이 처음에는 진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도 레슨시간이 점심시간인 12시부터 시작하였기에 직원 눈치 안보고 배울수 있었다. 문제는 진도였다. 한달 정도 지나니 한손에서 양손으로 음표가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함을 느낄수 있었다. 예습을 안해 가면 한반에 6명의 교습생을 10분 정도씩 점검을 하는중에 숙련되지 않으면 진도 나가기를 멈추고 계속 반복하다 보니 옆에서는 앞선 것을 치고있으면 창피하기도하고 내가 왜 여기 있지하는 모멸감에 사로 잡히게 됨을 느끼게된다. 하려면 독하게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어 연습량을 늘리고 디지털 피아노도 사무실과 집에 준비하여 예습 위주로 진도보다 3~4곡 앞서서 미리 연습을 하고 음표 밑에 써있는 음계를 모두 지워 힘들지만 음의 높낮이로 곡을 이어가는 연습을 계속하니 3개월정도 지나니 양손연주가 느리지만 조금씩 근접해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딸의 생일이 6월초라 쉬운 곡을 찾다보니 우연찮게 생일 축하곡을 선정 연습하게 되어 연습후 녹음을 해서 들려주기로 마음을 먹고 틈틈히 준비하였다. 딸 생일날 집에서 간단한 케익 커팅과 선물 교환후 나는 준비한 피아노곡의 녹음을 들려주었다. 2분여의 연주시간이 20분처럼 길게 느껴지고 딸의 눈가엔 눈물이 조금 비쳐지는듯 했다.


바이엘1권부터 시작해 3권을 마스터할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나를 덮쳐 오고 있었다.

코로나 급증으로 교습소가 당분간 폐쇄한다는 문자가 긴 설명과 함께 전달되는 순간 4개월간의 힘든 기간을 거쳐 바이엘 4권을 들어 가려는 때에 위기가 봉착한 것이었다. 예견이라도 한 듯 몇주전 선생님한테 4권을 추천해달라고 한후 예습 겸 미리 사둔 것이 다행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 있으면 개강한다는 것이 코로나의 급진적 확산으로 6개월 이상 간다는 소문이 지배적 이며 국가직영 교습소다보니 코로나 환자가 발견되면 복지관 자체가 페쇄된다는 소문도 나돌아 기다린다는 것보다 혼자 독학하기로 하고 매일 일과를 마치면 두시간씩 4권 첫째부터 하나하나 쳐보기로 했다. 더운 7, 8월 선풍기에 의지한채 한곡한곡 치면서 온갖 부정적 생각이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은 딸 생일에 연주곡 들려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부정에서 긍정으로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했다. 8월초 와이프 생일에는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쳐야지 하고 생각하니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7월에서 10월까지 4개월을 혼자 사무실에서 근무후 연습하다 시간나면 주말에 집에서 볼륨을 조절하며 연습을 계속해나갔다. 이러한 연습도 바이엘 4권 중반으로 가니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전문 교습학원의 개인교습으로 방향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몇 달전부터 바이엘 4권을 마치고 피아노 소곡집을 추천받아 다양한 작곡가의 곡을 연주 하고 있으며 나름 연말까지 목표를 정한곡이 쇼팽의녹턴 op.9 no2 , 생상스 백조, 하이든 세레나데, 드뷔시, 포레, 라벨 등 소품 위주로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고희를 앞둔 시점에 어렵게 시작한 피아노 연주기법을 계속해 배워갈 것이며 음악을 통해 삶의 여유와 풍요로움을 가족과 친지 그리고 소외된 이웃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어느새 두손은 피아노 건반위에 자리잡는다.“

 

빛바랜 악보 속에서의 옛글을 다시 읽으며 요즘도 가끔 흩어진 마음을 다시 잡고 피아노와 함께 노후를 보낼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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