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재 - 내 삶의 오답 노트

1. 유년 시절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배우다]

 

벌써 고등학교 졸업 50년이다.

나에게 오래된 삶의 기억들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이다. 고향에서 대가족 집안에서 자란 나는 식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 어려운 시대적 상황 때문에 고향에는 병이 만연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일 중의 하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위생이 안 된 시골에서 의사 면허도 없는 사람에게서 복부 수술을 받았던 일이다. 부모님께서는 귀한 쌀 몇 가마니를 팔아 수술비를 마련하셨다. 수술할 때 너무 아프고 참을 수 없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받았던 수술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아마도 큰 수술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병으로 몸도 가누지 못했던 막내동생을 업고 의사가 있는 먼 마을로 매일 힘들게 다니셨다. 그 막내동생은 간신히 회복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무렵 소원 중 하나는 학교에 가는 일이었다. 저녁에 같이 놀던 형들이 아침이면 사라지는 것이다. 학교에 간 것이다. 홀로 남은 나는 심심해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면서 놀았다. 찔레순, 진달래, 아카시아, 칡뿌리를 찾아 다녔다. 훌륭한 간식거리였던 것이다. 초근목피라는 말도 있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가난하였고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다.

마을에는 서당이 있었다. 덩치가 큰 인근 마을 젊은이들이 서당에 와서 글을 배웠다. 서당을 다니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래도 심심할 때면 서당을 기웃거렸다. 어느날 서당을 지나는데 글을 읽는 소리가 났다. 젊은이들이 동몽선습을 소리 내어 배우고 있었다. 天地之閒 萬物之衆 唯人最貴(천지지간 만물지중 유인최귀).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소귀호인자 이기유오륜야) (천지 사이의 만물의 무리 중에서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때 그 어려웠던 글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유년 시절에 어깨너머로 들었던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그 말이 평생 배움의 밑거름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다 특별하고,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다.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사람, 다른 때보다도 특별한 때 같은 건 없다는 생각을 유년 시절에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2. 국민학교 시절

[오답 노트 학이시습지]

 

국민학교는 입학 때부터 수난이었다.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형들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낯선 국민학교를 다녔다. 분교 같은 곳이었는데 형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고 어린 마음에도 낯설고 어색했다. 다행히 마을의 선생님 덕분에 형들이 가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을 도와 환경미화를 하고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종이를 아궁이에 버리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종이를 갖고 나오긴 했는데 아궁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아궁이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몰랐다. 당시 종이를 어디에 버렸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뭔가를 열심히 배워서 어려움을 이기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글을 공책에 썼다. 그것이 일기장의 시작이었고 그 일기장이 70이 다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답 노트의 시작이다. 잘 모르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나름대로 공책에 썼다. 공부시간에 배운 것 중에서 혼자 생각에 또는 선생님께서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나름대로 기록했다. 시험을 볼 때면 이 노트를 몇 번씩 보곤 했다. 그 결과 3학년부터는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지나가시면서 관심을 보이셨다.

국민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일이다. 당시에는 추운 날이 많았고 눈도 많이 왔다. 거의 어린아이 키만큼 눈이 왔는데 방학 중 소집일 날 학교에 갔다. 4킬로 가까이 되는 학교에 눈을 헤치고 간 것이다. 교무실 난로 가에서 꽁꽁 언 몸을 녹였다. 선생님들께서 먼 동네에서 위험한 길을 뚫고 온 것을 아시고 안 와도 되는데 하시며 걱정을 많이들 하셨다. 나는 학교는 무조건 가야 하는 줄 알고 왔던 것이다. 걱정을 하셨던 선생님들께서는 대견하다는 칭찬을 하셨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 후 나는 어디에 있든지 결석이나 결근을 한 적이 없다. 국민학교 때는 여러 가지 특기 교육이 있었다. 붓글씨 쓰기, 주판하기, 그리기, 시 창작 등의 경시 대회가 많았다. 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리기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마을을 들판에 그렸는데 어떤 친구는 산 중턱에 그렸다. 나중에 서울을 올라와 보니 언덕에도 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경험의 폭이 좁았던 것이다.

학년을 올라갈수록 상급학교 진학이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대개 친구들은 국민학교를 마치고 농사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선생님께서는 너는 서울에 올라가서 시험을 보아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당시 친척이 사시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용산중학교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 합격자 발표는 라디오 방송에서 했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들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합격자에 내 이름이 없을 줄 알았다. 왜냐하면,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는 중에 배탈이 나서 도저히 시험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특별히 시험을 잘 보라고 씨암탉을 해 주셨는데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라 배탈이 났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 10분 정도에 풀었던 문제가 다 맞았던 것 같다.

6학년 11월에 시험을 보고 고향에 와서 세 달 동안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세 달 동안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 후 영어 시간에 영어를 읽어보라는 선생님을 말씀을 듣고 매우 놀랐다. 대문자, 소문자도 모르는데 읽고 해석해 보라는데 너무 당황했다. 몰래 참고서를 보고 컨닝을 해 가면서 한글로 읽고 있었는데 그만 들켜서 아까운 참고서를 빼앗겼다. 다시 오답 노트가 필요해진 것이다. 집에 와서 혼자만의 오답 노트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학교에서 배우고 오답 노트를 만들어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배우자는 생각을 했다.

 

3. 중고등학교

[독서에 빠지다]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 중 하나는 독서였다. 시험 기간에는 시간이 많이 있어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하느님께서 창조자라면 작가는 제2의 창조자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고등학교 진학이 동일계 자동 진학이라 부담이 없었다. 그게 또 문제였다. 고등학교에서는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중학교 때 소홀히 해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비상이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오답 노트로 만들어 반복했다. 예습보다 복습 위주로 공부하다 보니 늘 뒤처진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많이 보았던 책은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이었다. 공부하는 방법은 오답 노트를 만들어 반복하는 것이었다. 영어책을 볼 때는 처음에 모르는 단어와 구절 중심의 오답 노트를 만들어 반복해서 공부했다. 오답 노트를 숙지한 후 책을 다시 보면 한결 수월했다. 수학도 잘 풀리지 않는 문제 중심으로 오답 노트를 만들어 공부했다. 대학 본고사 과목이 국어, 영어, 수학, 사회, 지리, 국사, 세계사,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독일어 등 12과목이었다. 한 과목이라도 잘못하면 원하는 대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한 과목을 한 달에 끝내도 12달이 필요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공부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답 노트를 잘 활용하는 것이었다.

 

4. 대학교 시절

[배움과 아르바이트]

 

대학 4년 동안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아르바이트는 주로 입주 과외와 시간제 과외를 병행했다. 하루하루가 바빴고 정신이 없었다. 전공 공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대학원 준비하랴 축제에 참여할 시간도 없이 4년의 시간을 보냈다. 4년 동안 주로 보낸 곳은 도서관과 입주한 가정교사 집과 시간제 과외를 한 곳이다. 입주를 하면서 시간제 과외까지 했으니 개인 시간이 거의 없이 대학 시절을 보냈다. 대학교 때 전공과 다른 많은 분야의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했었다.

 

5. 용산고등학교 교사 시절

[학생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가르침]

 

대학교 졸업 후 바로 발령을 받고 근무하다 곧 군대에 갔다. 얼마 후 모교인 용산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6년 동안 근무하면서 늘 염두에 둔 것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이끌어 주는가였다. 수업시간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고 매시간이 끝날 때마다, 보다 나은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가르침의 오답 노트를 만들어 갔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염두에 둔 말들은 자각, 정직, 책임, 자유, 성장, 관계 등이었다. 특히 학생들의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영적 성장에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행복을 주는지를 고민했다.

 

6. 가르침의 지침

[교육의 원칙들]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실천하고자 했다.

1) 학생들을 무조건 사랑하자. 학생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학생 편에서 응원하며 지원한다. 학생 하나하나는 누구나 행복할 천부의 권리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2)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의견을 물어 가르침의 방향을 정하는데 참고를 하고 그들의 말을 잘 경청하고 공감해 준다.

3) 부정적 수용능력을 키워 준다. 넘어져도 괜찮다고, 다시 일어서면 되는 것이라고, 지금 겪는 어려움은 인생의 한 측면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라고 격려해 준다.

4) 자각, 정직, 책임을 평생 실천하라고 한다.

5) 인간관계는 행복의 중요한 부분으로 네게 지금 오는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도 최선의 삶을 살아오면서 네게 온 것이기에 잘 대접하라고 가르친다.

6) 진정한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자신의 능력 향상을 위해 평생 노력하라고 한다.

 

7. 서울시교육청 장학사, 장학관

[한국 교육발전을 위해서]

 

용산고등학교 근무를 마치고 다른 학교로 이동한 후 장학사로 가게 되었다. 장학사로 간다는 것은 이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끝나고 학교 전체를 돕고 이끄는 행정을 한다는 뜻이다. 학교를 방문해서 학교가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성장을 돕는지를 선생님들과 함께 지원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학교가 어떻게 하면 교육활동을 잘 할 수 있는지 도와주고 선생님들과 협의하면서 교육행정을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어느 독지가가 장학금을 맡겼다. 당시에도 큰 금액이었다. 15억원의 이자만으로도 서울시교육청 소속 수백 명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었다. 장학금을 주어 학생들에게 큰 희망을 심어준 것에 대해 익명의 독지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교육청의 사업 중 하나로 각급 학교의 지도자급 학생을 선발해서 34일 동안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학생들과 지내다 보면 학생들은 많은 감동을 받고 성장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개인과 나라와 인류 발전에 도움을 주는 좋은 프로그램이다.

8 .교육부 연구관, 장학관

[국가 교육의 방향에 이바지]

 

서울시교육청 장학사를 마치고 교육부로 발령을 받았다. 장학사, 장학관 등 교육청, 교육부로의 승진은 매우 어렵다. 내가 쉽게 이동한 것은 오답 노트 덕분이다. 학생 때든 교사 시절이든 거의 매일 오답 노트를 썼다. 이것이 실력의 원천이었다. 시험문제의 대부분은 나의 오답 노트에 답이 있었고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교육부에서의 행정 업무는 서울시교육청 근무 시절과는 매우 달랐다. 매 순간 결정된 교육 방향이 곧 국가 교육 지침이 되었다. 정책 결정에서 내부 방향을 정한 후 전문가 의견을 수차례 걸친 후 학교 현장을 방문하여 의견을 수렴했다. 대한민국 교육발전에 도움이 어떻게 되는지 살폈고 해외 사례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해외 출장을 갔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살폈다. 국회 등 정부 기관과도 업무 조율을 한 후 교육의 방향을 잡아 지침을 내렸다. 도움을 준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9. 교장을 하면서

[꿈을 키우고 가꿔주기]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장을 하면서 교육 구성원인 학생, 교사, 학부모, 지역 사회의 행복과 성장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하였다. 학생들에게는 꿈을 심어 주고 가꾸는 길을 도와주고자 했다. 선생님들의 양해를 받아 모든 선생님들의 수업을 참관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수업시간이야말로 학교의 중심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과 잘 수업을 따라오는 학생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외국에 갈 때마다 한국을 부러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어떻게 학교가 훌륭한 선생님들을 모실 수 있는가, 학부모님들의 교육열이 왜 강한가, 학생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가 등이다. 선생님들과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이 보람을 가지고 수업을 할 수 있게 교장으로서 돕는가를 늘 고민했다. 학생들에 대한 면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선생님들은 실력도 있고 훌륭하다. 학생들은 참 열심히 배우고 학부님들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원동력의 하나가 교육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1차 교장을 한 후 다시 교육청으로 이동하여 교육 발전을 위한 정책을 수행하고 다시 2차 교장으로 부임하여 근무를 하였다. 두 차례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전교생 하나하나의 진정한 성장을 위해 교장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고민을 많이 하였다.

 

10. 은퇴 후

[성장, 건강, 관계]

 

은퇴 후에도 학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여전하다. 특히 학교, 교육청, 교육부를 넘나들면서 많은 분야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 교육이 나라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안다. 유능한 후배들이 열정을 가지고 잘 해 나가리라 믿는다.

은퇴 후에는 96세에 아직도 농사일을 하시는 어머니에게 효를 다하고 손주를 잘 돌보고 싶다. 손주를 돌보면서 많이 놀란다. 인류의 탄생과 발전을 보는 듯하다. 손주에게도 말한다. 항상 사랑한단다. 언제 어디서나 네 편이고 너를 응원할 것이다. 너는 행복할 천부의 권리를 갖고 태어났단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을 위해서 테니스 등 운동을 하면서 지내고 싶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오답 노트를 쓰고 있다. 컴퓨터 덕분에 쓰기가 수월해졌다. 그 덕분에 작년 오늘 어떤 일을 했는지, 5년 전 오늘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안다. 이제 남은 날에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자유스럽고 유능하고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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